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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 판서직을 준다고 한들 이 대자연과 바꾸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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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2천여 년 전의 오래된 이야기다. 중국 고대국가 한나라의 16대 황제이며 후한(後漢)을 새롭게 건국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 6년~AD 57년)에게는 어릴 때부터 동문수학 했던 '엄광(嚴光)'이라는 죽마고우가 있었다.
 
중원을 평정한 황제 광무제는 곁에 두고 쓸 믿을만한 사람이 필요했던 터라 어릴 적 친구 엄광을 찾았다. 엄광은 친구가 황제가 됐으니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한자리는 '떼어 놓은 당상'이었지만,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이름까지 바꾸고 절강성에 있는 부춘산으로 들어가 은둔했다.
 
광무제 유문숙은 친구를 중용할 목적으로 부춘산으로 사람을 보내 수소문해 보니 엄광은 양가죽 옷을 걸친 채 냇가에 앉아 낚시질을 하고 있었단다. 엄광은 황제가 내리는 높은 벼슬도 마다 하고, 평생 강호에 묻혀 대자연과 유유자적하며 초야에서 촌부로 살다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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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 사람들은 엄광의 자(字)를 붙여 '엄자릉(嚴子陵)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가 머무른 부춘산을 '엄릉산(嚴陵山)'이라 했고 낚시하던 부춘강을 '엄릉뢰(嚴陵瀨)'라고 불렀다. 그가 앉아서 낚시하던 돌을 '엄자릉조대(嚴子陵釣臺)'라 칭했다.
 
꽃의 향기는 백리를 가고 술의 향기는 천리를 가지만,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 했다. 그로부터 1000여 년이 흐르고 송나라 때 시인 대복고(戴復古 1167~1248)는 엄자릉의 마음을 담아 '조대(釣臺)'라는 시를 읊었다. 대복고 또한 엄자릉처럼 평생 벼슬을 멀리하고 시문에 몰두하는 삶을 살다 간 시인이다.
 
"세상사 다 잊고 낚싯대에 의지하니/ 삼공 벼슬을 다 준다 해도 이강산과 바꾸겠는가/ 평생에 황제 유문숙 그대를 잘못 알아/ 헛된 이름만 세상에 퍼졌구나"
 
엄자릉의 향기는 중국에만 머무르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조선까지 퍼졌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 김홍도(金弘道 1745~ ?)는 엄자릉 선생을 오마주 하는 그림 한 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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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앞에 둔 산자락과 논과 밭, 기와집, 일하고 있는 농부와 한가로이 고기를 낚는 낚시꾼 등 목가적 전원생활의 한가로움을 표현했다. 화제는 대복고의 시에 나오는 "삼공 벼슬을 다 준다 해도 이강산과 바꾸랴"(三公不換此江山)에서 차용했다. 김홍도가 57세 때 그린 <삼공불환도>로 보물로 지정된 그림이다.
 
이렇듯 복잡한 세상사 다 잊고 대자연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았던 엄자릉의 고고한 기상은, 시인묵객들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한 번쯤은 꿈꿔보는 로망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깜냥도 안 되는 권력을 손에 쥐고 흔들어 보려는 권력의지가 강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세 칸 정자 지어놓고 속된 거처를 멀리하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어등산 기슭에 자리한 등임동 내동마을 산 중턱에는 엄자릉과 대복고의 삶을 추앙하며 관직을 멀리하고 평생 전원에서의 행복한 삶을 살다 간 처사(處士)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있는 정자 '불환정(不換亭)'이 있다. 먼저 정자에 걸려있는 처사의 시 한 편을 감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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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칸의 정사를 짓고/ 의연하게 속된 거처를 멀리했네/ 성근 울타리 사이에 버드나무와 국화를 심었고/ 처사에게는 반듯한 거문고와 책뿐이라/ 입을 오므린 채 남새밭 풀을 매고/ 눈살을 찌푸려가며 약초를 캐었네/ 한가롭게 노닐며 속세 생각 끊어지니/ 참다운 벗도 허망함을 분명하게 알겠더라" <임덕원의 '원운(原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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