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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만의 순례길을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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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레네산맥 넘던 날, 팔등에 소름이 돋았다>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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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경 숙소에 도착해 침대를 배정받고 등산화를 벗는다. 오늘도 잘 버텨준 내 신발과 발에 감사한다. 샤워를 하고 다음날 입을 옷으로 갈아입고 빨래를 한다. 다음 날 아침에 필요한 몇 가지(칫솔, 치약, 선크림, 수건)를 따로 빼놓고 나머지 물건을 침대 위에 펼친다. 문장에서 토시 하나라도 덜어내듯이 눈에 불을 켜고 더 버릴 것이 없는지 살핀다. 첫 일주일간 이 일정은 최소화, 단순화, 경량화의 최전선에 도전하는 진지한 의식이었다.
 
떠나기 전 처음 배낭의 무게는 10kg가 넘었다. 그걸 줄이고 줄여 6kg짜리 배낭을 만들었다. 매일 먹는 약, 비타민, 선크림, 비누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 외에는 1그램도 못 줄일 것 같았다. 그래도 하루치 걷기를 마무리하고 나면 한 번 더 살핀다. 아이섀도, 파우더 팩트, 고체 샴푸와 린스, 변화무쌍한 날씨에 필요할 것 같았던 얇고 가볍고 비싼 실크 스카프, 썬 캡, 내 작품 사진으로 만든 엽서 5장, 혹시 몰라 챙겼던 작은 수첩, 볼펜 두 개 중 하나가 순서대로 배낭에서 퇴출됐다.
 
물건이 사라진 순서를 보면 그 와중에도 내가 어디에 더 집착했는지 알 수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화장이 필요 없거나 어색하다는 것은 하루 만에 깨달았고, 비누, 샴푸, 린스를 따로 쓰는 것이 엄청나게 거추장스러운 일이라는 것도 바로 알았다. 새벽의 추위와 한 낮 어지러운 스페인의 태양으로부터 보호해 줄 챙이 넓은 모자 하나면 충분했고, 제법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된 친구들을 여럿 사궜지만, 거기서 내 작품 얘기를 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일기나 기록은 스마트 폰 속에 있는 앱으로 충분했고, 같은 기능을 가진 물건(볼펜)이 두 개일 필요는 없었다. 만약 잃어버리면 하나 사면되는 것이고.
 
다만 스마트폰의 존재는 크기, 부피, 무게 대비 거대하고 절대적이었다. 여권도 분실하면 재발급받으면 되지만, 스마트폰 없는 순례길은 불가능하다. 교통편 및 숙소 예약, 길 찾기, 환전, 결제가 모두 폰 안에서 이뤄진다. 혹시 스마트폰을 분실하거나 고장 나면 어쩌지, 생각해 보면 답이 없다. 기존 폰에 등록된 신용카드를 정지시켜야 할 테니, 새 폰을 장만하더라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줄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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