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 통조림' 공장 때문에 생긴 유명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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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되었다. 습기 가득한 공기가 창문을 넘는다. 국수 가락 같은 빗줄기가 하염없다. 길을 나서야 하는데, 빗속에 들어설 용기가 선뜻 나지 않는다.   

전라도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고향을 물으면 선뜻 답하지 못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고향에 와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이 전라남도 여행이었던 까닭이. 22개 시‧군 중 어느 곳부터 시작할 것인지 한동안 망설였었다. 최순희 전남문화관광해설사가 나주를 권했다. '남도의 천년 고도'라는 것이 이유였다. 하긴 전라도라는 지명도 전주와 나주에서 오지 않았던가.
 
6월 22일 토요일 오전, 양성숙 나주시 전남문화관광해설사를 만나기로 한 곳은 금성관 뜨락이었다. 빗줄기가 칼국수 면발처럼 굵었다. 약속 장소를 바꾸었다. 금성관 앞 2층 카페로. 빗물 흐르는 창가에서 예가체프 커피향에 인사를 담아 건넸다.
 
창밖에선 금성관이 비에 젖고 있었다. 커피를 마셨고, 수다를 떨었다. 물었다. 나주에서 딱 하루가 주어졌을 때,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어야 하느냐고.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나주를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영산강이 아닐까 싶어요. 고대 문화의 중심지니 천년 목사골이니 모두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영산강이 나옵니다. 마한의 터전도, 후백제의 견훤도, 고려의 왕건도.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나주가 한양과 닮았다고 하면서 소경(小京)이라 하였죠. '한양 아래 작은 서울'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영산강에 의지한 나주 지형이 한양을 쏙 빼닮았답니다.
 
예전엔 지금보다 훨씬 넓었습니다. 영산강 물길이 영향을 미치는 곳이 다 나주였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영산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고요. 흑산도도 나주 목사 관할이었습니다. 그곳 유배자들을 잘 관리하지 못해 나주 목사가 인사 고과에서 불이익을 당해 삭탈관직을 당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흑산도 사람들이 여기 와서 살았습니다. 하구언 둑 막기 전에는 바닷물이 영산포까지 들어왔죠. 영산포 홍어는 어쩌면 당연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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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탕의 본향, 나주

카페를 나섰다. 금성관(錦城館) 담장을 따라 걸었다. 담장 밖에서 건너다보는 것보다는 창밖으로 내려보는 풍경이 더 좋았다. 담장 안 너른 잔디밭이 나주 객사(客舍) 터다. 객사는 각종 행사가 열리는 공간이며, 외국 사신이나 중앙 관리가 사용하던 숙소였다. 요즘으로 치면 국가에서 운영하는 호텔이라고나 할까.
 
중심 건물인 금성관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와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셨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행했다.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의 객사가 없어졌다. 금성관은 나주군청으로 사용되는 바람에 지금까지 남아 있다. 보물 2037호다.
 
비는 지치지도 않고 줄기차게 내렸다. 금성관 옆 목사 내아로 갔다. 나주 목사 사택이다. 커다란 팽나무가 있는 집이다. 황순원의 소나기 같은 모습으로 마루에 앉았다. 낙숫물 소리가 모내기 철 개구리 울음소리 같다. '비멍' 틈새로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빗소리에 담겨 떨어지며 동심원을 그린다.
 
"저기 팽나무가요. 음, 대충 정확하게 500살가량 될 거예요. 1980년 태풍 때 벼락을 맞아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을, 시민들이 살렸습니다. 그 보답으로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니, 꼭 빌고 가세요. 한옥 체험도 할 수 있어요. 일반 고택과 다른 느낌이 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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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관 바로 앞이 나주곰탕거리다. 가게마다 길게 늘어섰다. 대열에 동참했다. 양 해설사 설명과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판소리 공연 같았다. 양 해설사의 박물관 근무 이력이 실감 났다. 역사와 문화에 해박했다.
 
"일제강점기 때 나주에 소고기 통조림 공장이 있었어요. 살코기만 통조림으로 만들어 군수물자로 실어 갔죠. 남은 부산물로 끓인 장터국밥이 나주 곰탕의 시작이었죠. 1970년대 초 오일장터였던 곳이 곰탕 거리가 되었습니다. 방식도 양지하고 사태를 푹 고는 것으로 바뀌었고. 지금의 나주 곰탕 형태가 탄생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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