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 전에 '부익부 빈익빈' 질타한 존재 위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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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행가사(紀行歌辭)'를 생각하면 송강 정철이 먼저 떠오른다. 실학의 상징 인물을 얘기하면 다산 정약용이 생각난다.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선입견이다. 기봉 백광홍과 존재 위백규가 있다.
 
백광홍(1522∼1556)은 정철보다 앞서 〈관서별곡(關西別曲)〉을 지었다. 가사문학의 첫 작품이다. 〈관서별곡〉은 왕명을 받은 백광홍이 관서지방으로 떠나는 순간부터, 도착해서 부임지를 순시하기까지의 여정과 심정을 그렸다. 25년 뒤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큰 영향을 줬다. 백광홍은 열 손가락에 꼽히는 조선시대 문장가다.
 
위백규(1727∼1798)는 호남을 대표하는 실학자다. 일찍 벼슬길을 포기한 그는 세태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1700년대에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그는 '힘 있는 부자가 더 많이 갖고 사치를 하며,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진다'고 직격했다.
 
하여, '부자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고, 부자에게 세금을 제대로 거둬야 하며,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한테는 잡다한 세금을 면제하고, 자력으로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외쳤다. 당시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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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백규는 '향촌이 인사와 재정을 담당하고, 관리의 숫자는 줄이고, 세금을 자율 부과·징수하고, 향촌 방위를 책임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지금 우리가 도입한 지방자치와 자치경찰제를 200여 년 앞서 주장한 것이다.
 
위백규는 천문과 지리도 통달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도 훨씬 앞선 1770년 〈환영지〉를 펴냈다. 환영지는 우리나라 최초 세계지리서 겸 팔도지리서다. 〈지제지(支提志)〉도 냈다. 지제(支提)는 천관산의 옛 이름이다. 책에는 천관산의 역사는 물론 계곡과 암자, 바위에 얽힌 이야기가 담겨 있다.

누구보다도 앞서 생각하고 진취적인 생각과 사상을 지닌 위백규였다. 큰 맥락에서 정약용의 사상과 궤를 같이 하지만, 그보다 35년 먼저 났다. 신유박해로 정약용이 유배길에 오를 때, 위백규는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었다. 위백규는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의 학맥을 이은 대학자로 칭송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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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홍과 위백규가 나고 자란 고을이 장흥이다. 길게 흥할 장흥(長興)이 배출한 많은 문인과 학자 가운데 앞자리를 차지한다. 그 가운데서도 방촌마을은 존재 위백규가 나고 자란 마을이다. 방촌마을은 옛 장흥의 가온누리였다.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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