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순직과 더불어 끝난 7년간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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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길을 밝히는 건 달이다. 달마저 구름속에 들어가 숨어버리면 의지할 것이라고는 별이다. 달이 빛이라면 별은 방향타다. 천문기구와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별자리는 밤길을 가는 사람들의 길잡이였다. 대표적인 별이 북극성이다. 밤에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북극성을 보고 갈길을 찾았다.
 
임진왜란 당시 제 살길만 찾아 백성을 버리고 떠난 왕과 당파싸움과 사리사욕에만 치중하다 국난을 초래한 권력자들에게 진저리 치던 백성들에게 이순신은 큰 별이었다. 비천한 몸을 의지할 수 있는 지팡이였다. 그런 그가 임진왜란의 종지부를 찍는 최후의 전쟁에서 왜적의 총탄을 맞고 순직했다.
 
조선을 돕는다는 명분 하에 참전한 명나라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을 궤멸시키다시피한 일본군은 연이어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켰다. 조선이 함락되면 명나라가 직접 공격받을 것을 우려한 명나라는 조선을 돕는다는 명분 하에 참전하여 사로병진작전에 돌입했다.
 
'사로병진작전(四路並進作戦)'은 1598년 9월 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조·명 연합군이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세운 작전이다. 조·명 연합군은 서로군· 중로군· 동로군을 편성해 순천왜성(고니시군), 사천 선진리 왜성(시마즈군), 울산왜성(가토군)을 공격하는 육상 삼로군과 수로군으로 왜군을 동시에 공격한다는 작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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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부터 6월 12일까지 보름간 진행됐던 '이순신 해전 현장 답사'에 나선 율리안나호의 주된 관심사는 수로군에 관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칠천량 패전으로 조선이 사라질 위급한 순간에 명량해전 승리로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 이순신 장군에 대한 것이다.
 
명나라 진린의 수군이 조선 수군에 합류한 시기는 1598년 7월 16일이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 승리 후 고하도에서 조선수군을 재건한 후 고금도로 이진해 순천 왜교성에 있는 왜군을 압박하고 있던 때이다. 진린은 조·명 연합수군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모든 결정권을 행사했다. 지휘관의 성품은 전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당시 영의정 유성룡의 진린에 대한 평가다.
"나는 진린의 군사가 수령을 때리고 욕하기를 함부로 하고 노끈으로 찰방 이상규의 목을 매어 끌어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역관을 시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나는 같이 앉았던 재상들을 보고 말하기를 '안타깝게도 이순신의 군사가 또 장차 패하겠구나! 진린과 같이 군중에 있으면 견제를 당하고 의견이 틀려서 반드시 장수의 권한을 빼앗고 군사들을 학대할 것이다. 이것을 제지하면 화를 더 낼것이고 그대로 두면 한정이 없을 것이니 순신의 군사가 어찌 패전을 면할 수 있겠는가?"
 
명군은 자국 영토에서의 전쟁을 피하려고 참전한 것이었지만 조선을 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침략국인 일본군 못지않게 피해를 끼치기도 했다. 이순신은 처음부터 진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접대를 극진히 했을 뿐 아니라 몇 차례 전투에서 거둔 전공을 진린에게 돌리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의 조카 '이분'의 <행록>에 기록된 내용이다. 1598년 7월 18일 일본 군선 백여 척이 녹도를 침범해 온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진린과 이순신이 연합함대를 구성해 출동했다.
 
그 모습을 본 일본 군선 2척이 도주했다. 이때 녹도만호 송여종이 전선 8척을 동원해 적선 11척과 접전해 적선 6척을 모조리 포획하고 적의 머리 69급을 베어 용맹스럽게 귀환했다. 이 해전의 결과는 당일 고금도에 보고되었고 운주당에서 주연을 베풀고 있었던 통제사와 명나라 제독 진린에게도 보고되었다.
 
소식을 들은 진린은 명나라 수군이 활약하지 못한 것에 격분해 술잔을 내던졌다. 통제사 이순신은 명나라 장수 지린과 계금에게 각각 40급과 5급의 수급을 취하게 하여 이들을 달랬다.
 
1598년 9월 중순경 조·명 연합군은 수륙합동작전을 계획했으나 유정은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다. 유정의 태도에 화가 난 진린이 이순신과 함께 수군 단독작전에 나선 것은 이순신 때문이었다.
 
이순신은 자신을 제지했던 진린의 요구사항을 대부분 수용했지만 일본군을 공격하는 것에는 좀처럼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진린은 같은 무장으로서 감명을 받아 이순신을 높이 평가하였다. 진린이 훗날 선조에게 올린 글을 보면 그가 이순신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가를 알 수 있는 글이다.
 "이모(이순신)는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다시 세운 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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